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전개 (문단 편집) === 5월 19일: 수세에서 공세로의 전환 === || [[파일:계엄군에게 붙잡힌 사람들.gif|width=400]] ||<|3> [[파일:1980년 5월 19일.jpg|width=450]] || || 계엄군에게 붙잡혀 옷이 벗겨진 사람들 || || [[파일:총에 대검을 꽂고 날뛰는 계엄군.jpg|width=400]] || || 대검을 총에 꽂은 채로 사람을 쫓는 군인들 || 금남로의 치열한 시위현장 || >광주 애국 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으로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 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 특전단 놈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읍니다. 왜 학생들이 그토록 소리 높이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대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바로 유신잔당과 전두환 일파 그놈들입니다.''' >----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시민민주투쟁회' 명의로 뿌려진 [[http://www.518archives.go.kr/books/ebook/2/#page=22|「호소문」]] 5월 18일의 잔혹한 진압으로 시위가 진압됨으로서 19일 아침의 광주는 겉으로는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평일이었기에 회사와 관공서는 문을 열었고, 초, 중, 고교에서도 정상 수업이 이뤄졌다. 하지만 전날의 충격과 분노는 시민들의 마음을 들끓게 하고 있었다. 오전 9시부터 시민들이 금남로로 속속 모이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가 되어 3,000 ~ 4,000여 명이 군중이 집결하여 경찰, 군인과 대치했다. 시위대에는 학생도 있었지만 일반 시민들의 비중이 눈에 띄게 늘었다. 전날의 계엄군의 폭력에 대한 소식이 시민들에게 전해지면서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에 가세하게 된 것이다. 경찰과 군인들이 최루탄을 쏘면서 제압하려 들자 사람들은 합심하여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맞섰다. 시위군중은 가톨릭센터를 중심으로 관광호텔과 광주은행 앞을 거쳐 전남도청 방면으로 진출하려 애썼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구호가 외쳐졌고, 「애국가」, 「정의가」같은 노래가 불려졌다. 대형 화분, 보도블록, 공중전화 박스, 교통 철책 등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기도 했다. 그러자 공수부대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아니면 그보다 더 잔인하게 진압작전을 실시했다. 19일 도착한 제11공수여단[* 이들은 18일 오후 3시에 서울에서 광주로 출동할 것을 명령받아('''18일 오후 4시 7공수의 살육 작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동을 거쳐 19일 새벽 2시에 도착했다.] 61~63대대는 시내에서 시위 군중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했다. 시민들은 군인들을 피해서 주변 상가, 건물, 골목으로 숨어들어 갔지만 군인들은 3~4명씩 무리를 지어다니며 끝까지 추격에 나섰다. 잡힌 사람한테 곤봉과 총검을 휘둘러 피투성이로 만들었으며, 옷을 벗겨서 팬티만 남긴 채로 끌고가기가 부지기수였다. 진압이 계속 될수록 계엄군의 진압은 점점 도를 넘어서서 연행한 사람들에게 거리 한복판에서 기합을 주거나 여관을 습격해 직원은 물론이고 투숙객까지 잡아갔고, 자신들의 소행이 눈에 띌 것을 염려해 주변 건물들을 향해 "문을 닫고 커튼을 쳐라. 내려다보면 쏴버리겠다"는 협박도 서슴치 않았다.[* 이를 두고 기자 [[김영택(1936)|김영택]]은 이렇게 썼다. "아무 죄도 없는 국민을 향해 이렇게 폭언(폭력)을 행사하는 장군은 도대체 어느 나라 누구를 위한 별인가? 그는 '''점령군 사령관'''인가?"] 또 구경을 하거나 자신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건물 안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예외 없이 쫓아가 폭력을 행사했다.[* 오전 11시쯤, 무등고시학원 부근에서 계엄군이 두 여인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자 학원 내의 고시생들이 일제히 야유를 했다. 그러자 계엄군들은 학원에 난입하여 50여 명의 학생들을 끌어내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파일:무등고시학원생을 구타하는 계엄군들.jpg|실제 사진]]] 이렇게 되니 경찰 간부조차도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 공수부대에게 걸리면 다 죽는다"'''고 울먹거릴 정도였다. 점심 때가 되어서는 시위는 거의 해산되고 거리는 다시 침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금남로와 충장로는 어제처럼 다시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고, 상가, 회사, 관공서들은 일제히 문을 닫고 직원들을 내보냈다. 그러나 강경한 진압은 오히려 시위에 참가하는 시민들의 수를 더욱 늘어나게 했다. 12시부터는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할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고, 공수부대가 점심식사를 위해 철수한 오후 1시 30분부터는 수많은 군중이 거리를 가득 채웠다. 젊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중년와 노년, 부녀자, 노동자들도 쉽게 눈에 띄었다. 시위군중은 오전에 비해서 더욱 대담하고 과격하게 투쟁했다.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며 진압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고, 시민들은 돌멩이와 화염병을 던지며 덤볐다. 가톨릭센터 앞에서는 기독교방송 취재차량이 불에 타는 채로 경찰 저지선을 향해 다가갔고, 근처 공사장의 기름통도 불에 타는 채로 경찰 저지선에 부딪혀 굉음과 함께 불길을 뿜어냈다. 시민들은 가톨릭센터 옥상에 군인들이 있음을 알아내고 이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들을 붙잡기는 했으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차에 계엄군의 진압이 임박하자 결국 시민들이 우왕자왕하는 사이 군인들은 달아나고 말았다.] 한편, 하늘 위로 [[헬기]]가 나다니며 해산을 종용하는 방송을 하자 분노한 시민들이 헬기를 향해 울분을 토해내기도 했다. 진압작전은 계엄군이 식사를 마친 오후 2시 30분~3시 사이에 시작되었다. 진압에 투입된 제11공수여단 61, 62, 63대대와 제7공수여단 35대대는 금남로에서 '''바둑판식 분할점령'''[* 이 진압방식은 이렇게 진행된다. 먼저 군인들을 투입하여 시위군중을 여러 무더기로 흩어지게 한다. 그러고는 이들을 시위 장소에서 몰아낸 다음, 다른 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진압을 진행 중인 타 병력과의 연결을 시도한다.] 방식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들은 다이아몬드형으로 진압 대형을 짜고 금남로를 향해 진격하면서 보이는 족족 시민들을 때려잡았다. M60 기관총을 장착한 장갑차가 시위대를 향해 돌진했고, 시민들은 급히 대피했으나 미처 피하지 못하고 가톨릭센터 내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계엄군에 의해 잔인한 폭행을 당했다. 3시 40분부터는 예비병력으로 남아 있던 제7공수여단 33대대까지 투입되어 다른 병력들과 함께 거리마다 무리한 진압작전을 진행했다. 1시간 즈음 지나자 금남로의 시위는 잦아드는 듯 보였다. [youtube(xxFucbA7XMI)] >시위대를 뒤쫓던 공수대원이 복개상가 2층으로 청년 한 명을 쫓아 악착같이 따라 올라갔다. 그 광경을 보고 시민들이 다시 공수대원의 뒤를 쫓아 올라갔고, '''시민들에게 역으로 완전히 포위된 공수대원'''이 겨우 빠져나갔다. ...공수대원 한 무리가 노점상 아주머니의 과일 그릇이 그들의 진로를 방해하자 아주머니의 아랫배를 군홧발로 내질렀다... 공수대원은 노인을 곤봉으로 후려갈겼다. "네놈들 때문에 다 잡은 놈들을 놓쳤다!"면서 고함을 질렀다...이런 모습을 도망치며 바라보던 시위 군중이 갑자기 일거에 돌아섰다. '''"좋다. 우리 모두 다 죽여라!"''' 하면서 공수부대의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전혀 예상치 않은 반응이었다. 갑자기 시위대가 거세게 반격해오자 추격하던 공수대원 7~8명이 기겁을 하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한 명이 낙오되었다. 시민들이 뒤쫓자 그는 광주천을 따라 도망치다 다급해지니 다리 밑으로 뛰어내렸다. 시민들이 그를 향해 돌을 던졌다.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면개정판),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창비, 2017, p109~111 >[[4.19 혁명#s-3.3|3.15 마산의거]] 당시를 100분위의 지진계로 말한다면 40도다. [[사북사건|사북사태]]는 45도이며, [[부마민주항쟁|부마사태]]는 60도 선이다. 그러나 지금 광주는 그 지진계의 바늘이 '''100도를 때려 부러진 상태'''다. >---- >당시 [[동아일보]] 기자 [[김충근]]의 증언[* 「금남로 아리랑」, <5.18 특파원 리포트>, 한국기자협회, 풀빛, p214] 하지만 전과는 달리 시위대는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시민들은 필사적으로 계엄군에 저항했으며, 칼이나 각목 등 각종 무기들을 사용하거나 거리의 물건들로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또 중장년들이나 부녀자들이 보도블럭을 깨면 그 조각들을 젊은이들이 던지는 방식의 협업도 이루어졌다. 공사판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연장, 각목, 쇠파이프 등을 시위군중에게 흔쾌히 제공해주기도 했다. 마침 휴교령이 내려져 귀가하던 학생들도 대거 시위대열에 동참하였다.[* 사실 휴교령 이전에도 12시 경부터 [[광주대동고등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 [[금호중앙여자고등학교|광주중앙여자고등학교]] 등에서는 교내시위가 벌어지고 시내로까지 진출하려다가 좌절되었다. 또 [[보문고등학교(광주)|광산여자고등학교]]와 [[정광고등학교]]에서는 논의를 거쳐 2시 경에 시위를 시도했으나 저지당했다. 이후 오후 3시 경에 광주 전역 대부분의 고등학교가 휴교령을 내리자, 귀가하던 학생들이 수십 명씩 몰려다니면서 시위에 참여했다.] 그리하여 계엄군의 계속된 진압으로 금남로로부터 밀려났어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군중은 '''"마치 풍선 가운데를 꾹 누르면 주변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광주시를 돌아다녔다. 충장로, 적십자병원, 광주공원, 광주천, 광주일고, 현대극장, 양동시장, 공용버스터미널, 대인시장, 전남여고, 중앙국민학교, 문화방송, 녹두서점, 노동청 등 수많은 장소에서 시위대가 있었다.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시위에 나섰고 보다 공세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소수의 공수부대원들의 경우에는 시민들에게 반격을 당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시민들의 시위는 마치 싸우다 죽겠다는 듯이 점점 열기를 띄어갔다. 시위대열은 시내 주위 곳곳에 포진하며 경찰, 군인들과 대치했으며 충돌 또한 쉬지 않고 일어났다. 가장 치열했던 곳 중 하나는 공용터미널 부근에서였다. 치열한 시위 도중 한 여성이 '''"나는 공산당도 아닙니다. 난동자도 아닙니다. 단지 선량한 광주시민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라고 외치며 '''"우리 모두 나섭시다. 학생들을 살립시다. 계엄군을 물리치고 우리 스스로 광주를 지킵시다"'''라고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그러자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었고 계엄군이 이를 진압하러 나서면서 한바탕 난전이 벌어졌다. 이 시위 도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고 연행되었는데 특히 터미널 내 지하도로 피신한 사람들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들은 몽둥이로 두들겨 맞거나 대검에 무참히 찔려 심각한 상해를 입은 것이다.[* 실제로 이 날 오후 6시 경 공용터미널에서만 7~8구의 시체를 보았다는 증언이 있다. 5.18 연구의 권위자인 [[김영택(1936)|김영택]]의 <5월 18일, 광주>에서도 이 일이 언급되어 있을 정도로 이 일은 계엄군의 잔혹성을 증명하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 시신들의 정확한 신원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사망자 중에 5.18 초기에 사망한 사람도 여럿 있으므로 그들 중에 사망자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초기 진압작전 중에서도 악명 높았던 것 중 하나가 [[총검|대검]]을 통한 진압이었다.18일에도 대검은 사용되었으나 19일에는 18일에 비해 대검의 사용빈도와 그로 인한 부상자 숫자가 더욱 늘었다. 시민들의 저항에 직면한 공수부대원들이 잔혹한 진압을 벌인 탓이었다. 그 예로 19살의 여성 최미자는 19일 오후 7시 30분 경 여러 명의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가슴에 대검이 찔리는 중상을 입었다. 대검은 그녀의 오른쪽 겨드랑이와 젖가슴 사이 오른편을 찔렸기에 그녀는 한 달 가까이 치료를 받고나서야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시민들에 의해 목격되면서 '''"여고생의 젖가슴을 두부 자르듯 잘라버렸다"'''라는 (대검에 관한) [[소문]]과 [[유언비어]]가 퍼지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계엄군들은 터미널에서 발생한 부상자를 실어나르는 [[택시기사]]들에게도 폭력을 휘둘렀는데 이에 대한 기사들의 분노가 다음 날 시위의 또 다른 주축으로 작용하게 된다. 계엄군은 여전히 야만스러운 방식으로 시민들을 대했다. 진압봉과 대검은 기본이었고 온갖 가혹행위들이 시민들에게 저질러졌는데, 종국에는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기에 이르렀다. 오후 4시 50분경 [[광주고등학교(광주)|광주고등학교]] 앞에서 '''최초의 발포'''가 발생했다. 시민들과 장갑차가 충돌했는데, 시민들이 장갑차에 불을 지르려고 하자 안에 있던 공수부대원이 총을 난사했다. 이 일로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 3학년생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294191|김영찬]](19)이 손과 대퇴부에 3발을 맞고 쓰러졌다. 시민들이 그를 도우려고 다가가는 사이에 장갑차는 달아나버렸다.[* 후에 2007년 국방부진상조사위원회는 조사 과정에서 당시 장갑차에 타고 있던 11공수여단 63대대 차OO 대위가 발포했다는 것을 밝혀냈으나 문제의 그 인물은 24일 송암동 군 오인 전투에서 사망했다. 충격적인 것은 그 대위가 '''소속된 부대의 기록에는 이 발포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헌데 광주에서 정보 관련 업무를 보던 505보안부대의 기록 「광주사태 일일속보철」 5월 20일자에는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다음 날인 5월 21일자에서는 이 발포가 계엄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시위대 내 불순분자들이 계엄군 탓으로 몰려는 지능적 수법이라며 말을 바꾸고 [[왜곡]]을 자행했다.][* 최근 국정원이 5.18 당시 계엄군 장갑차의 사진을 공개했는데, 사진을 보면 이게 위 증언에서 나온 최초 발포한 차륜형 장갑차 ([[KM900]])이다. 당시 계엄군은 차륜형 장갑차를 단 한대만 운용했기 때문에, 사진에 나온 장갑차가 최초 발포한 그 장갑차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268340|뉴스 기사]]] 또한 이 날에 두번째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는 공사장 막노동일을 하던 [[https://www.youtube.com/watch?v=sfvZMzwGJ8U|김안부]](36)로 일하는 와중에 광주공원에 들렸다가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인해 오후 5시경 살해당했다.[* 그의 시신은 밤새 비를 맞다가 다음 날에서야 전남주조장 앞 공터에서 주조장 직원들에 의해 발견되어 전남대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었다. 전남대병원에서 김 씨를 시신 검안한 결과, '''[[https://youtu.be/dCHyXwe5VOQ|두부 총상(KBS 뉴스 2020. 5. 13.)]]'''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만일 이게 사실인 경우, '''계엄군은 19일에 최초로 광주시민을 사살한 게 된다.'''] 이외에도 계엄군에 의해 두들겨 맞고 대검에 찔린 환자들이 대거 병원으로 몰려들었기에 광주 시내의 병원들은 북적거렸다. 허나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병원에 오게 된 부상자들이 계엄군의 진압작전에 겨우 빠져나온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저녁 7시가 되면서 비가 왔지만 시위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는 1,000여 명의 군중이 시위대를 벌이다가 [[경남]] 표지판을 달고 있는 화물트럭과 대형 아치에 불을 질렀다. 시민들은 양동, 누문동, 임동, 고속버스터미널, 광주역 등의 지역에서 게릴라처럼 시위를 벌이며 계엄군과 쫓고 쫓겼다. 시위는 자정 이전에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텔레비전 방송에 광주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것을 알고 분노해야 했다. 한편 밤 11시 경 정웅 31사단장은 광주에 파견된 공수부대 지휘관들과 경찰 지도부를 불러모아 강경진압을 중단하라는 '31사단 작전명령 제3호'를 지시하였다.[* 이미 아침 10시에는 [[상무대]] 전투교육사령부에서 '광주지역 기관장회의'가 [[윤흥정]] 전남북계엄분소장에 의해 열렸었다. 여기서는 [[정시채]] 부시자를 포함한 관리들과 정웅 31사단장을 포함한 군인들이 참석했다. 여기서 윤흥정은 기관장들로부터 '''"군복을 입고 있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대한 항의를 전달받았다. 그리하여 윤흥정은 무혈진압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물론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전두환]], [[정호용]] 등을 포함한 신군부 실세들의 생각은 달랐고, 더 강경한 진압을 위해 제3공수여단과 보안요원들을 광주에 파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